자유광장
[음반패설]<Oldies & Memories by> : 그 시절 대학로에선 by 이정식 (2007)
페이지 정보
본문
2010년 봄. 나는 기어이 서울 재즈 아카데미 (SJA) 레코딩 엔지니어링 과정에 들어갔다. 그 동안 막막함이라는 20대 특유의 감성으로 억눌러왔던, 음악에 대한 배움의 욕구를 해갈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우선 휴학계를 내기 위해 아버지와 담판을 지어야 했다. 우리 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한 평생을 공직에 투신하신, ‘엄하다'라는 형용사의 아이콘 같은 분이셨다. 그러한 한계로 인해 ‘좋은 대학에서 공부 잘하고 대기업이나 공무원이 되는 것’ 외에, 자식의 다른 가능성을 알아봐주시기 어려운 분이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식을 이기지 못하는 평범한 부모님이시기도 하셨고, 결국은 나의 응석에 손을 들어주셨다.
당시 서울 재즈 아카데미(이하 SJA)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이 보이는 큰 길 맞은 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빌딩이라고 하기에는 좀 작고, 그냥 건물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큰 공간을 캠퍼스로 쓰고 있었다. 내부에는 연습실이나 시설들도 제대로 구비되어 있었고, 또 나와 같은 꿈 있는 청년들이 모여서 귀여운 짓을 벌이던 것이 제법 학교 같은 분위기를 내었다. 사실 그냥 학교에 준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SJA에서의 공부는 즐거웠다. 매일 내가 모르는 것을 배웠지만, 하나 같이 재미있고 궁금한 것들 투성이었다. 국문학도였던 내가, 대학교에서는 절대 들을 일이 없던 전기, 컴퓨터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다. 시창과 청음, 화성학 같은 수업들도 어떻게든 들어보려고,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갖은 노력을 했다. 따라가기 힘들었지만, 보람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울함이라는 또 다른 20대 특유의 감성이 나를 때때로 쓸쓸하게 만들었다. ‘20대 중반을 지나는 나이에, 내가 이러고 있는 게 괜찮을까?’하며 계속해서 스스로를 의심했다. 남들은 영어를 한다, 중국어를 한다, 혹은 무슨 자격증을 딴다 하고 취업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노동 시장에 ‘스펙’이라는 단어가 일종의 신조어로 한국 사회에 퍼지고 있던 시절이었다. 친구들이 두문불출하며 스펙을 쌓고 있을 때, 나는 여기서 음악이나 듣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모두가 레벨을 올리는 세계에서 엉뚱한 스킬에만 경험치를 몰빵하고 있었던 나는, 가끔씩 혹은 자주 우울해했었다.
그 우울감을 해소하는 나만의 방법이 있었다. 낮에는 낙산공원의 아무 벤치에나 앉아 도심을 멍하니 바라보는게 내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평일 낮 낙산공원은 전망이 탁 트인 한산한 근린 공원이라 할 수 있었다. 그 곳에서 몇 시간이고 햇빛을 쬐고 있으면, 방전된 멘탈이 돌아오곤 했다. 날씨가 흐리거나, 깜깜한 밤이면 하릴없이 혜화동 거리를 걸어다니는 것도 내 마음에 안정을 주었다. 학림 다방에 앉아서 궁상도 떨고, 이음 책방에서 책들을 뒤적였다.
그러다 때때로 재즈클럽 ‘천년동안도’에도 갔다. ‘천년동안도’로 말할 것 같으면, 예나 지금이나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정통 재즈 바이다. 진작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나는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고서부터 종종 ‘천년동안도'를 찾곤 했었다. 그 무대를 채우는 라인업은 매일 다르면서도 반복되었는데, 그러한 패턴이 내가 군대를 다녀온 2010년 시점까지도 이어져오고 있었다. 그 패턴 중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은 단연 ‘이정식'이었다.
색소포니스트 이정식의 이름은 알만한 사람들에게는 이미 익숙했다. 김광석이나 전람회, 이승철, 서태지에 이르기까지, 이미 대중가요의 색소폰 세션으로는 유명하신 분이었다. 그런 분의 공연을 지척에서 볼 수 있다는 매력이, 나를 ‘천년동안도'로 이끌었다. ‘이정식’ 그 이름 석자를 천년동안도의 입간판에서 볼 때마다 나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고, 기어이 한켠에 앉아 그 분의 연주를 듣고 있노라면, 익숙한 그 음색에 말로 표현하기 힘들 멜랑콜리에 빠졌다.
한번은, 무려 군 휴가 중에 ‘천년동안도’를 들렀던 적이 있다. 그 때는 음악을 잘 모르는 친구와 함께 갔었는데, 음률에 문외한인 그 녀석조차도 명연주자 이정식의 연주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곤 ‘역시 대가는 대가'라고 생각했었다. 가게의 뒤켠에서는 바로 전해에 발매된 이정식의 앨범 <Oldies & Memories>을 판매 중이었고, 친구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그 앨범을 집어들었다. 그 모습에 나 역시 앨범 하나를 따라 집었고 비닐 포장을 뜯고는 그 자리에서 이정식님의 사인을 받았다.
<Oldies & Memories>는 그 이름처럼 옛날 유명했던 기성 곡들, 특히 올드 팝이라 불리는 일련의 곡들을 편안하게 연주한 앨범이었다. 재즈의 폼을 취하고는 있지만 다분히 팝 적인 음반이었다. ‘Happy together’, ‘Danny Boy’, ‘One summer night’ 등 익숙한 넘버들이 많아 듣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그리움이 느꼈다. 나는 이 앨범을 가지고 자대에 복귀하였는데, 한번은 후임들이 자고 있는 생활관에서 자장가랍시고 이 CD를 틀어제끼는 만행도 저질렀었다.
다시 2010년 그 시점으로 돌아가보자면, 나는 ‘천년동안도' 그 곳의 라인업에 이정식의 이름이 여전히 가장 위에 건재하다는 점에서 용기를 얻었던 것 같다. SJA에서는 이론을 배웠다면, ‘천년동안도'에서는 그 분의 존재를 통해 마음을 가다듬었다. 올드하지만 올드해지지 않고, 추억이지만 새로운 기억을 남길 수 있는, 언젠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되는 꿈을 꾸었지 않았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도 때때로 이정식의 <Oldies & Memories>를 찾아 듣는다. 이 앨범을 산지 10여년도 더 지났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느낀다.
- 재즈 클럽 천년동안도는 2023년 현재 서울 종로에서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 이정식 선생님의 유튜브 채널이 있다.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구독하도록 하자.
===
Recording Location Edge Studio, Jazz Club ‘Yellowjackets’
Duration 72:20
Release Date December 18, 2007
Recording Date October 16 ~ November 12, 2007